생물학 결정론

생물학적 원인에 의한 결정론. 모든 게 생물학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견해. 실제로 존재하는 견해는 아니다.

로즈, 르원틴, 카민의 정의

스티븐 로즈, 리차드 르원틴, 레온 카민의 정의:

우리가 앞으로 연구하고 비판하게 될 환원론자와 생물학 결정론자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사회적 현상은 개인들의 행동의 총합이다.
  2. 이들의 행동을 대상으로서 다룰 수 있다. 즉, 특수한 개인들의 뇌 속에 위치하는 성질들로서 구체화할 수 있다.
  3. 구체화된 성질들은 어떤 종류의 척도로 측정될 수 있고, 따라서 개인들은 그들이 소유한 양에 따라서 서열이 매겨질 수 있다.
  4. 성질들에 대해 개체군의 기준이 수립될 수 있다. 표준으로부터의 어떤 개인의 편차들은 그 개인이 치료받아야 할 의학적 문제들을 반영할 수 있는 이상(abnormalities)들이다.
  5. 구체화되고 의학화?성질들은 개인들 뇌 속의 사건들에 의해 일으켜진다. 이 사건들은 해부학적 국재화에 의해 주어질 수 있고 특수한 생화학 물질의 변화량과 관련된다.
  6. 이들 생화학 물질의 변화된 농도는 유전적인 원인들과 환경적인 원인들 사이에서 구분된다. 따라서 차이들의 ‘유전의 정도’ 또는 유전가능성은 측정될 수 있다.
  7. 구체화된 성질들의 이상 양들에 대한 치료는 바람직하지 않은 유전자를 제거하거나(우생학), 유전공학 등등)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들의 소재를 제거하기 위해 생화학적 이상들을 고치거나 뇌의 특수 부위를 자극 또는 운동시키기 위한 특이한 약물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떤 입에 발린 말은 보조적으로 환경을 개입시키는 데 소요될 수도 있겠지만, 일차적 처방은 ‘생물학화된다’ —p25-26, Not in our genes

스티븐 핑커의 반론

에드워드 윌슨과 리차드 도킨스를 향한 급진주의 과학자들의 공격은 결정론환원론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 두 단어가 검정 깨처럼 그들의 글 곳곳에 뿌려져 있지만 대부분 전문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애매한 독설로서 사용되고 있다. 가령 다음 두 글은 반항적으로 빈 서판 이론을 내세운 스티븐 로즈, 리차드 르원틴, Leon Kamin의 책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에서 발췌한 것이다:

사회생물학은 인간 존재에 대한 환원주의적, 생물학적 결정론에 입각한 설명이다. 그 지지자들은 … 현재와 과거의 사회 제도가 안고 있는 세부적인 면모들이 특정한 유전 작용의 불가피한 발현이라고 주장한다. … 환원주의자들은 인간 사회의 특성들이 … 더 이상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개별적 행동과 경향의 총합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공격적”이기 때문에 사회가 “공격적”이라는 것이다.

윌슨의 인용문에는 이러한 우스꽝스런 신념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물론 도킨스의 글도 마찬가지였다. … 결정론과 환원론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수학자들이 사용하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결정론적 체계는 현재 상태가 이전 상태에 의해 확률적으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결정되는 체계이다. 도킨스는 물론이고 어느 멀쩡한 생물학자도 인간 행동이 결정론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꿈꿔 본 적이 없다. —p206,207

사실 환원론에 대한 비난은 거꾸로 서 있다. 리차드 르원틴과 스티븐 로즈의 연구를 보면 그들이 바로 현상을 유전자와 분자의 차원에서 설명하는 전형적인 환원주의 생물학자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킨스는 동물행동학자로서 훈련을 받았고, 자연 서식지에 사는 동물의 행동에 관해 글을 쓴다. 에드워드 윌슨으로 말하자면 생태 연구의 개척자이고 분자 생물학자들이 지저분한 생물학이라고 경멸하는 환경 운동의 열렬한 옹호자이다.

모든 공격이 실패하자 로즈, 르원틴, 카민은 마지막으로 도킨스의 이마에 파멸적인 인용문을 갖다 붙였다. “그것(유전자)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이것은 상당히 결정론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도킨스가 실제로 쓴 글은 인용문과는 아주 다른 “그것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였다. 르원틴은 변조한 인용문을 다섯 군데나 사용했다. —p209, 빈 서판

유전자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들은 갑자기 이성을 잃고 50%와 100%, “어떤”과 “모든”, “영향을 미친다”와 “결정한다”를 구분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이런 지적 장애의 진단은 간단하다. 만약 유전자의 영향이 신학적인 이유로 0이어야 한다면, 0이 아닌 모든 값들도 똑같이 이단적일 것이다. —p662, 빈 서판

도킨스의 반론

유전적 원인과 환경적 원인은 원칙적으로 서로 차이가 없다. 어떤 쪽의 원인에서 오는 것이든 그 영향에는 바꾸기 힘든 것도 있고 쉽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영향은 보통 바꾸기 힘들다 해도 적정한 작용인자를 부여받으면 쉽게 바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유전적 영향이 환경적 영향보다 더 비가역적이라고 기대할 통상적인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p34

결정론 문제에 어떤 견해를 취하든 간에 ‘유전적’이란 말을 끼워 넣어도 전혀 그 차이를 명확히 해줄 수 없다. 가령 당신이 완벽한 결정론자라면 당신의 모든 행위는 과거의 물리적 원인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믿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당신은 자신의 성적 부정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물리적 원인의 몇 가지가 유전적인 것인지 또는 아닌 것인지가 대체 어떠한 차이가 있다는 것인가? 왜 생물학 결정론이 환경 결정론보다 더 불가피적이거나 책임 회피용으로 생각되는 것인가?

유전자는 환경적 요인과 비교했을 때 초결정론적이라는 신념은 극단적인 고집에서 오는 신화일 뿐이며, 현실적으로 감정적인 고통을 가져다줄 수 있다. —p38,39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신화가 있는데 이미 그것을 이 장의 서두에서 언급했었다. 컴퓨터 신화도 유전자 신화와 마찬가지로 현대인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어 있다. …

스티븐 로즈는 난교적인 남자들이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이유로 심술궂게도 무죄 방면했고, 스티븐 제이 굴드는 “우리들이 현재처럼 프로그램되어 있다면 가지고 있는 특성은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보통 우리가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말을 절대적인 부동성, 행위의 자유에 대한 정반대의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컴퓨터나 로봇은 세간의 평판에서는 유연성이 없다는 점에서 악명 높고, 설령 그 결과가 분명히 터무니없다고 해도 문자 그대로 지령을 실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컴퓨터가 어떻게 모든 사람의 지인에게 저 유명한 100파운드짜리 청구서를 계속 보낸단 말인가?

(필자는) 이와 같은 컴퓨터 신화를 유전자 신화처럼 잊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필자도 “거대하고 볼품없는 로봇 속에” 떼 지어 있는 유전자라든가 우리 자신을 생존 기계라고 쓸 당시에 좀 더 조심했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장은 정신 나간 듯한 생물학 결정론의 예로써 기고만장하여 인용되고, 분명히 1차적 그리고 심지어는 3차적 근거로 재인용되어 왔다(예를 들어 ‘Nabi’, 1981: The Dialectical Biologist에 의하면 이것은 리차드 르원틴의 익명이다.) 로봇 공학의 술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며, 전혀 망설임 없이 그것을 다시 사용할 것이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좀 더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고 깨닫는다. —p44-45, 확장된 표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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